[칼럼]노년에 입문하다

나이는 도둑처럼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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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  khwan0118@hanmail.net

왼쪽 발목이 부러졌다. 하산 길에 방심하다 움푹 패인 곳을 디뎠다. 발목이 거의 직각으로 꺾인 듯했다. 강렬한 통증이 뒷머리를 때렸다. 눈에서 불이 번쩍 일었다. 응급차에 실려 가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걸을 만했다. 복숭아뼈 부위가 부은 것 말고는 말짱한 듯했다. 그런 상태로 일주일을 돌아다녔다.

나이는 도둑처럼 다가온다

약간 저릿저릿하긴 했지만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게 일을 키웠다. 밤새 끙끙 앓았다. 다음날 정형외과를 찾아 엑스레이를 찍었다. 복숭아뼈 일부가 떨어져 나갔단다. 아니 어디 부딪히지도 않았는데 골절이? 아주 불친절한 의사는 그럴 수 있다고 퉁명스레 말한다.

평소 병원에 대한 불신이 그 지경을 만들었다. 다치자마자 바로 병원에 갔었더라면…. 무릎 아래까지 깁스를 했고 목발(사실 금속이다)을 지급받았다. 의사는 절대 왼발을 딛지 말라(심지어 실내에서도)며 2주일 뒤에 오라 했다. 의사의 지시대로 해보려 나름대로 애썼다.

악전고투의 시간을 보낸 후 두 번째 엑스레이를 찍었다. 의사는 전혀 차도가 없다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다시 2주일 후에 오라 했다.

후배의 어린 아들(열 살)도 비슷한 시기에 깁스를 했다. 그 아이는 2주일 만에 깁스를 풀었다. 의사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아주 불성실했음에도 나보다 훨씬 회복이 빨랐던 것이다. 아주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이가 드니 이제 뼈도 잘 안 붙는구나. 깁스 덕에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니 심사가 복잡해진다.

현기영 작가는 “어느 나이가 되니까 다른 것들이 보인다”며 “늙어간다는 느낌도 상당히 좋고 새롭다”고 했지만, 아직 그 나이까지는 아니어서 그런지 괜히 울적해지고 억울한 느낌만 든다. 나도 모르게 나이는 도둑처럼 다가왔다.

노안(老眼)이 온 지는 이미 꽤 됐다. 머리숱도 성글어지고, 치아는 갈수록 부실해 진다. 어금니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조금 무리한 날이면 잇몸이 붓는다. 가끔 이명 현상도 느낀다. 귀에 솜을 틀어막은 것처럼 멍멍해진다.

가을에만 찾아오던 알레르기성 비염은 이제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눈도 침침해져서 책에 집중하는 시간이 짧아진다. 밥 먹다 자주 흘리고 입가에 뭐를 잘 묻힌다. 피부 탄력은 줄어들고 몸에서 노인 냄새가 나는 것도 같다. 문득 거울을 보면 낯선 이가 거기 있다. 나이가 드는구나. 50대 중반을 향하면서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100세 시대, 회색 쇼크, 인생 2막… 고령화 사회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자 트렌드라고 한다. 나의 노년은 어떨까. 막막하고 불안하다. 가족은 너무 멀리 있고 벌어 놓은 것도 신통치 않다. 환갑을 전후해서 일자리에서 물러나면 그다음에 무엇을 하지? 혼자서 병들면 또 어쩌지? 깁스만으로도 이리 괴로운데….

‘철든 노인’을 준비하자

바야흐로 100세 시대라고 한다.

고전학자 고미숙에 따르면 100세 시대는 문명의 성과가 아니고 자연스러운 인간의 수명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현대인이 100세 인생-장수를 축복으로 여기지 못하는 이유는 자본주의 문화와 그에 따른 생로병사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철없는 상태로 대부분을 보낸 삶은, 산 것이 아닙니다. 이 시간성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나이 들고 오래 산다는 것은 내가 그 시간을 어떻게 통과하느냐가 핵심이지 그저 객관적으로, 양적으로 시간이 늘어난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나이를 먹는다고 자동적으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철없는 노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이듦은 완숙한 인간미를 갖는 과정이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꼭 곱게 늙어야 하나’라고 되묻는다. 머리숱이 풍성하고, 허리가 곧고, 주름이 없고, 체액이 통제되는 ‘우아한 몸가짐’을 요구하는 몸에 대한 비현실적인 욕망이야말로 정상적인 나이듦을 기피하게 만드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몸은 모든 정치의 시작이죠. 우리는 육체적 고통, 신체적 비참함에 시달리는 이들에게도 우아한 몸가짐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몸 밖의 대소변’을 수용할 때, 살아 있는 이웃들의 다양한 몸도 존중할 수 있어요. 인간이 사망하기까지 평균 투병 기간은 10년, 그 취약하고 ‘못생긴’ 시절도 소중한 삶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늙고 병들고 추해지는 것을 두려워 말자.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 쭈글쭈글한 나를 긍정하고, 또 다른 나를 이해하자.

노년의 아름다움과 가치는 육체에 있지 않고 ‘지혜’에 있다. 지혜란 결국 나이 들고 기억력이 떨어져 쓸데없는 ‘반(反)지식’이 사라져야 얻을 수 있는 통찰력이다. 낙엽이 떨어져야 나목(裸木)의 모습이 온전히 보이듯, 나이듦 없이는 세상을 명료하게 볼 수 없다. 물리학자 장회익 선생은 노년은 홀로 사유하고 스스로 깨우치는 기적의 시간이라 강조한다.

“지식에는 진정한 지식과 잘못된 지식 두 가지가 있어요. 완전한 무지는 없어요. 잘못된 지식, 이것이 문제죠. 그런데 노인이 되면 지금까지 잘못된 채 쌓여 있던 지식이 자꾸 떨어져요. 낙엽이 떨어지듯 우리 기억력도 떨어지는데 쓸데없는 기억부터 사라지게 돼요. 쓸데없는 것이 다 사라지고 나면, 정말 중요한 것만 보여요. 그리고 넓게 멀리 보이죠. 이것을 모으는 게 지혜입니다.”

내적인 충만, 추함의 수용, 타인에 대한 이해, 자연과의 교감, 고갱이만 남은 지혜, 여유와 너그러움…. 나이듦은 이런 미덕을 배워 가는 소중한 과정이다. 그래 항복하고 순명하자. 그리고 잘 늙어가자. 노년에 입문하겠다고 마음먹자 세상이 달리 보이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처음보다 깁스가 덜 불편하다.

승인 2016.04.30  14:37:29  |  조회수 :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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